500가구 이하 재개발·재건축, 구청장에게 맡기면 정말 빨라질까?
정부·여당이 서울의 500가구 이하 재개발·재건축 정비구역 지정 권한을 서울시장에서 자치구청장으로 넘기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취지는 분명하다. 서울시까지 거쳐야 하는 행정 절차를 줄여 정비사업의 속도를 높이겠다는 것이다. 실제 정부·여당은 지난 8월 23일 고위당정협의회에서 관련 법안 추진 방침을 밝혔고, 최소 6,000가구 안팎의 정비사업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주택 공급이 부족한 상황에서 불필요한 행정절차를 줄이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재개발·재건축은 단순한 건축허가가 아니다.
수백억 원에서 수천억 원의 사업비가 움직이고, 도로·학교·공원·상하수도·교통·전력 등 기반시설이 함께 움직인다. 한번 만들어진 도시공간은 30년, 50년 이상 남는다. 따라서 중요한 질문은 **“누가 빨리 허가할 것인가”가 아니라 “누가 장기적인 책임을 질 것인가”**가 되어야 한다.
일본 도쿄는 ‘구청 자율’보다 20년짜리 큰 그림을 먼저 만든다
우리와 도시구조가 비슷한 일본 도쿄를 보면 참고할 부분이 많다.
도쿄도는 도시계획의 목표 시점을 약 20년 뒤인 2040년대로 두고 광역 차원의 도시계획 마스터플랜을 운영한다. 그리고 구·시·정·촌의 세부 도시계획은 이 상위계획에 맞춰 수립하도록 하고 있다.
재개발도 마찬가지다.
도쿄도의 ‘도시재개발 방침’은 「도시재개발법」을 근거로 재개발 사업을 장기적·종합적으로 체계화하는 마스터플랜으로 운영되고 있다. 개별 지역이 필요에 따라 개발하더라도 도시 전체의 교통·주거·상업·방재 계획과 연결시키는 구조다.
도쿄도는 2017년부터 2040년대를 목표로 하는 ‘도시 만들기 그랜드디자인’을 유지해 왔으며 현재도 이를 토대로 정책을 보완하고 있다. 정권이나 시장이 바뀌었다고 장기 도시구조 자체를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방식과는 거리가 있다.
지방에 권한을 주되 광역도시 전체의 청사진 안에서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미국도 지방정부가 개발권을 갖지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구조는 아니다
미국은 주마다 제도가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방식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주택난이 심한 캘리포니아 사례는 한국에 상당한 시사점을 준다.
캘리포니아에서는 도시와 카운티가 지역 토지이용과 주택계획에서 큰 권한을 갖는다. 대신 지방정부는 **장기 종합계획(General Plan)**을 수립하고 그 안에 주택 공급계획인 ‘Housing Element’를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지방정부의 주택계획은 일정 주기마다 갱신해야 하고, 캘리포니아 주정부의 주택·지역개발부(HCD)가 법률에 부합하는지 심사한다. 주정부가 지역별 주택수요를 배분하고 지방정부가 이를 계획에 반영하는 구조다.
즉,
개발은 지방정부가 실행하지만 주택공급의 큰 목표와 장기계획은 상위정부가 관리한다. 지방분권과 광역적 통제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OECD도 ‘권한 이양’보다 정부 간 협력을 강조한다
OECD 역시 토지와 주택정책에서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토지이용·주택·공간계획은 서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중앙정부·광역정부·기초정부 간 역할을 명확히 하고 서로 조정하는 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지적도 있다. 개발 권한을 지나치게 작은 지방정부 단위에만 맡기면 각 지방정부가 자신의 세수나 지역 이해관계에 유리한 개발을 선택하면서 전체 도시 차원에서는 주택 부족·기반시설 불균형·난개발이 발생할 수 있다고 OECD는 지적한다. 그래서 상위정부가 지역 간 이해를 조정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한국에 대한 OECD의 별도 연구에서도 장기 투자전략, 중앙·지방정부 간 협력, 책임소재의 명확화와 지속적인 평가가 도시재생 정책의 중요한 조건으로 제시됐다.
문제는 ‘구청장을 믿느냐’가 아니다
500가구 이하 정비구역 지정권을 구청장에게 넘긴다고 해서 기초단체장의 전문성이나 능력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진짜 문제는 권한과 책임의 구조다. 재개발 하나를 결정하면 그 지역의 도로가 달라지고 학교 수요가 변하며 지하철·버스·상하수도·전력·공원 등 기반시설 부담도 달라진다.
25개 자치구가 각각 자신의 지역만 바라보면서 용적률과 정비구역을 판단한다면 서울 전체 도시계획과 충돌할 가능성도 있다. 실제 이번 권한 이양 방안을 놓고도 사업기간 단축 기대와 함께 도시계획의 파편화와 난개발 가능성이 동시에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권한을 이양한다면 최소한 서울시의 광역 도시계획과 교통·기반시설 기준은 유지하고, 자치구가 그 틀 안에서 신속하게 사업을 처리하도록 만드는 방식이 보다 합리적이다.
‘빨리빨리’보다 더 필요한 것은 정권이 바뀌어도 계속되는 정책이다
우리나라 부동산 정책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업을 5년짜리 정치 일정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정비구역 지정에서 조합설립, 사업시행인가, 관리처분, 이주·철거, 착공과 입주까지 재개발·재건축에는 통상 여러 해가 필요하다.
대통령도 바뀌고 시장도 바뀌고 구청장도 바뀐다.
그때마다 용적률이 달라지고 규제가 달라지고 공급정책이 바뀐다면 아무리 인허가 기간을 몇 개월 줄여도 전체 사업은 빨라지기 어렵다.
일본 도쿄가 2040년대를 바라보는 도시계획을 만들고, 미국의 지방정부가 장기 종합계획과 주택계획 아래 개발을 추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도시는 한 정권의 임기보다 오래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택정책에서 필요한 것은 여당의 정책이나 야당의 정책이 아니다.
좋은 정책이라면 정권이 바뀌어도 이어지는 국가의 정책이어야 한다.
행정을 단순화하는 것은 필요하다. 권한을 지방으로 이양하는 것도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도시의 모습을 결정하는 개발권이라면 속도보다 먼저 장기계획, 기반시설, 광역조정 그리고 정책의 연속성을 확보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주택 공급에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빨리빨리’가 아니라 ‘끝까지’ 가는 정책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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