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집 사려면 부모가 있어야 한다?
"엄마, 은행에서 대출이 안 나온대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내 집 마련의 공식은 비교적 단순했다. 일정한 소득이 있고 신용이 양호하면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집을 살 수 있었다. 부족한 자금은 미래 소득으로 메우는 구조였다. 그러나 지금의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
최근 국토교통부 자료에 따르면 올해 1~4월 주택 취득 자금 중 증여·상속 자금은 약 3조6000억 원에 달했다. 불과 4개월 만에 지난해 연간 규모의 절반을 넘어선 수치다. 반면 주택담보대출은 각종 규제와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제한으로 사실상 구매력을 잃어가고 있다. 결국 시장은 냉정하게 답하고 있다.
"은행이 아니라 부모가 금융기관이 되고 있다." 이제 서울 강남의 아파트를 구매하는 데 필요한 것은 높은 연봉이 아니라 부모의 자산 규모가 되어가고 있다. 사라지는
'자수성가형 내 집 마련'
과거 한국 사회는 부모 도움 없이도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희망이 존재했다. 직장생활을 하며 저축하고 대출을 활용해 자산을 축적하는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 서울 아파트 평균 가격은 15억 원을 넘어섰고 강남권은 30억~50억 원을 호가한다. 연봉 1억 원을 받는 전문직조차 대출 규제를 감안하면 원하는 지역의 주택을 매입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결국 부족한 자금은 부모의 증여나 상속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부동산 시장이 점차 노동소득의 영역에서 자산소득의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이런 현상은 이미 유럽 여러 국가에서 나타나고 있다.
🇮🇹 이탈리아 : "맘모네(Mammone) 세대"
이탈리아에서는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와 함께 사는 청년들을 '맘모네(Mammone)'라고 부른다. 로마나 밀라노 같은 대도시의 집값이 급등하면서 청년들은 독립 자체를 포기하기 시작했다. 30대 중반까지 부모 집에서 거주하는 것이 흔한 풍경이 됐다.
주택 구입은 물론 전세 개념조차 없는 상황에서 부모 지원 없이는 내 집 마련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결국 부모의 주택을 상속받거나 부모가 계약금을 지원하는 구조가 일반화됐다.
🇩🇪 독일: 평생 임차인의 증가
독일은 전통적으로 임차 비율이 높은 나라다. 하지만 최근 베를린, 뮌헨, 함부르크 등 주요 도시의 집값과 임대료가 급등하면서 젊은 세대의 자산 격차가 심각해지고 있다.
독일 경제연구소 보고서에 따르면 부모가 주택을 소유한 가정의 자녀와 그렇지 않은 자녀의 자산 형성 속도는 크게 벌어지고 있다.
부모의 증여 여부가 자산 형성의 출발선을 결정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 프랑스 파리 : 부모가 계약금을 내주는 사회
파리 역시 상황은 비슷하다. 평균 소득으로는 아파트 구입이 어려워지면서 '부모 지원금(Aide Familiale)'이 사실상의 주택 구입 필수 요소가 됐다. 프랑스 부동산 업계에서는 "첫 집 구매자의 상당수가 부모 자금을 활용한다"는 분석이 이미 상식처럼 받아들여진다. 은행보다 부모의 통장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캥거루족의 환생
한국에서는 한때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와 함께 사는 청년들을 '캥거루족'이라 불렀다.
당시에는 취업난 때문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지금 등장하는 새로운 캥거루족은 성격이 다르다. 취업을 못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좋은 직장을 가지고 있음에도 집값 상승과 대출 규제로 인해 부모의 자산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과거 캥거루족이 생활비를 의존했다면 지금의 캥거루족은 주택 자금을 의존한다. 이것은 단순한 세대 현상이 아니라 자산 계층의 세습 현상이다.
가장 큰 문제는 사회 이동성의 붕괴
주택 시장에서 부모 찬스가 일반화되면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사회 이동성이다.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직장에 취업해도 부모 자산이 없는 청년은 출발선 자체가 다르다.
반대로 부모 자산이 풍부한 계층은 증여를 통해 더 좋은 지역의 부동산을 선점한다.
결국 집값 상승은 다시 자산 격차를 확대하고, 확대된 자산 격차는 또다시 증여를 통해 세습된다. 부동산이 거주의 공간이 아니라 계층을 구분하는 장벽이 되는 것이다.
대출 규제의 역설
정부는 가계부채를 줄이기 위해 대출 규제를 강화한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예상치 못한 현상이 나타난다. 대출이 막히자 현금 부자만 살아남는다. 중산층은 탈락하고 자산가의 자녀는 부모 자금으로 시장에 진입한다. 결국 규제는 집값을 잡지 못한 채 현금 동원 능력이 있는 계층만 유리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은행이 사라진 자리를 부모가 대신하는 순간, 부동산 시장은 실수요 시장이 아니라 상속 자본주의 시장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지금 한국 부동산 시장에서 벌어지는 증여·상속 자금 급증은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그것은 "노력의 시대"에서 "상속의 시대"로 이동하고 있다는 경고음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캥거루족의 부활이 아니라 자산 세습 사회의 시작을 목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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