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비사업 시장에서 새로운 단어가 등장하고 있다. 바로 ‘대수선’이다.
그동안 노후 아파트의 선택지는 사실상 두 가지였다. 재건축 또는 증축형 리모델링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두 방식의 단점을 피해 갈 수 있는 대안으로 대수선 사업이 급부상하고 있다. 특히 용적률이 높아 재건축 사업성이 부족한 단지나, 리모델링을 추진하다 인허가 문제와 사업성 악화로 좌초된 단지들이 새로운 해법으로 대수선을 검토하고 있다.삼성물산과 현대건설 등 대형 건설사들까지 시장 선점 경쟁에 뛰어든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수선이란 무엇인가
대수선은 건축물의 골조를 유지하면서 외관과 내부 설비를 대대적으로 개선하는 공사다. 재건축처럼 건물을 철거하지도 않고, 리모델링처럼 세대 수를 늘리기 위한 증축도 하지 않는다. 대신 외벽, 창호, 배관, 전기설비, 주차장, 커뮤니티 시설, 조경 등을 신축 수준으로 개선하는 방식이다. 쉽게 말하면 "뼈대는 남기고 나머지는 새로 만드는 공사"다. 실제로 공사가 완료되면 외관만 보면 신축 아파트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의 변화가 가능하다.
대수선의 가장 큰 장점은 속도다
현재 대한민국 정비사업의 가장 큰 문제는 시간이다.
재건축은 안전진단부터 조합 설립, 사업시행인가, 관리처분인가, 이주 및 철거를 거치면 10년에서 15년이 걸리는 경우가 흔하다. 리모델링도 증축 인허가와 구조안전성 검토 과정에서 사업기간이 길어지고 있다. 반면 대수선은 구조 변경 범위가 제한적이고 인허가 절차가 상대적으로 단순하다. 업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재건축 대비 사업 기간을 절반 이하로 줄일 수 있다고 평가한다.특히 300%가 넘는 고용적률 단지들은 사실상 재건축으로 얻을 수 있는 추가 용적률이 부족하다. 이런 단지들에게는 재건축보다 대수선이 훨씬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비용 부담은 분명한 약점
그러나 대수선이 만능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사업비 조달 구조다. 재건축은 일반분양을 통해 막대한 개발이익을 확보할 수 있다. 증축형 리모델링도 늘어난 세대를 일반분양하여 일부 사업비를 충당할 수 있다. 반면 대수선은 일반분양 물량이 사실상 없다. 결국 공사비 대부분을 기존 입주민이 부담해야 한다. 최근 공사비 상승으로 평당 공사비가 크게 오른 상황에서 주민들의 추가 분담금 부담은 상당할 수밖에 없다.
사업 속도는 빠르지만 수익성은 제한적이라는 것이 대수선의 구조적 한계다.
해외는 이미 오래전부터 활용했다
사실 대수선 개념은 한국보다 해외에서 먼저 발전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독일이다.
독일은 전후 복구 과정에서 기존 건축물의 구조체를 최대한 활용하는 도시재생 정책을 추진해 왔다. 특히 베를린에서는 1960~1980년대 아파트 단지 상당수가 철거 대신 대규모 개보수 방식으로 현대화됐다. 에너지 효율 개선, 단열 보강, 설비 교체 등을 통해 신축 수준의 주거환경을 확보했다.
프랑스 역시 비슷하다.
파리는 역사적 건축물 보호 원칙 때문에 무조건 철거 후 신축하는 방식보다 기존 구조를 살리는 리노베이션을 선호한다.
최근에는 탄소중립 정책과 맞물려 대규모 철거보다 기존 건물 재활용이 더욱 확대되고 있다.
일본도 흥미로운 사례다.
일본은 한국보다 재건축 규제가 상대적으로 덜하지만, 인구 감소와 공급 과잉 지역에서는 철거 후 신축보다 장수명화(長寿命化) 개념의 대규모 수선을 선호하고 있다. 특히 도쿄 외곽 지역에서는 엘리베이터 교체, 내진보강, 설비 현대화 중심의 대수선 사업이 활발하다. 탄소중립 시대의 새로운 정비 모델 대수선이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ESG와 탄소중립 때문이다. 건물 철거 과정에서 발생하는 건설 폐기물은 엄청나다. 국제 연구기관들은 건물 한 채를 철거하고 다시 짓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 배출량이 건물 생애주기 전체 탄소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고 분석한다. 유럽 국가들이 기존 건축물 활용에 집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앞으로 탄소배출 규제가 강화될수록 대수선의 경제성은 더욱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한국형 대수선은 성공할 수 있을까
결국 대수선의 성패는 주민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 재건축은 큰 수익을 기대할 수 있지만 긴 시간이 필요하다. 대수선은 수익은 적지만 빠르게 주거환경을 개선할 수 있다. 지금까지 한국의 정비사업은 '개발이익 극대화'가 중심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주거환경 개선' 자체가 목적이 되는 시대가 올 수 있다. 고용적률 단지 증가, 공사비 상승, 탄소중립 정책 확대라는 세 가지 흐름이 맞물리면서 대수선은 단순한 틈새시장이 아니라 재건축과 리모델링을 보완하는 새로운 정비사업 모델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의 도시가 더 이상 무조건 허물고 새로 짓는 방식만으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정비사업의 경쟁력은 얼마나 크게 짓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효율적으로 살려내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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