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의 신뢰는 비공개가 아니라 투명성에서 시작된다
서리풀2지구 공공주택지구 지정과 관련한 행정소송은 단순한 개발 찬반의 문제가 아니다. 행정 절차의 정당성과 국민의 알 권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건이다.
국토교통부는 환경영향평가협의회 9명의 위원 가운데 주민대표가 포함되어 실제 회의에도 참석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정작 주민들은 누구를 대표로 선정했는지, 어떤 절차를 거쳐 위촉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국토부는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물론 개인정보 보호는 중요하다. 그러나 공적인 의사결정 과정에서 주민대표가 누구인지조차 확인할 수 없다면 주민들은 과연 무엇을 신뢰해야 하는가.
환경영향평가협의회는 단순한 자문기구가 아니다. 개발사업이 환경과 주민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하는 매우 중요한 법적 절차다. 이 과정에서 주민대표는 주민 의견을 전달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다면 최소한 누구를 어떤 절차를 거쳐 주민대표로 선정했는지는 공개되어야 한다. 그래야 주민들도 자신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더욱이 주민들은 자신들이 대표 추천을 요청받은 사실도 없고, 실제 회의에 참석했다는 사람도 알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행정의 공정성과 절차적 정당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국토부는 협의회가 평가서 전체를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 항목과 조사 범위를 검토하는 자리이므로 하루 일정이면 충분하다고 설명한다. 제도적으로는 맞는 설명일 수 있다. 그러나 주민들이 납득하지 못한다면 절차는 법적으로 적법할 수 있을지라도 사회적 신뢰를 얻기는 어렵다.
우리나라 행정은 아직도 '공개하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는 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공공권한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이다. 권한이 커질수록 책임과 공개의 수준도 함께 높아져야 한다.
🇩🇪 독일은 대규모 개발사업에서 주민 참여 절차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주민대표의 선임 과정과 의견 제출 절차가 비교적 명확하게 운영되며, 행정기관은 주민 의견을 어떻게 검토했는지 설명할 책임을 진다. 설명하지 못하면 행정 신뢰 자체가 흔들린다.
🇺🇸 미국역시 연방 차원의 환경영향평가 제도에서는 주민 의견 수렴 과정과 공청회 기록, 제출된 의견 및 이에 대한 행정기관의 답변을 공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주민들은 자신들의 의견이 어떻게 검토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으며, 이러한 투명성이 행정에 대한 신뢰를 만든다.
일본 또한 도시계획과 재개발 과정에서 주민설명회와 공청회 자료를 가능한 범위에서 공개하고, 위원 구성과 회의 결과를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모든 정보가 공개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공공 의사결정의 책임 소재는 국민이 확인할 수 있도록 운영하려는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개인정보 보호라는 이유 아래 공공 의사결정 과정까지 지나치게 비공개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개인정보 보호는 개인의 사생활을 위한 제도이지, 공적 책임을 숨기기 위한 방패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국민은 결과만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다. 절차가 공정했는지 확인할 권리가 있다. 공청회와 협의회는 형식적으로 개최하는 행사가 아니라 국민과 행정이 함께 정책을 만드는 과정이어야 한다.
행정은 신뢰를 강요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투명성을 통해 얻는 것이다. 누가 참여했고, 어떤 의견을 냈으며, 왜 그런 결론에 이르렀는지를 국민이 확인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행정은 권위를 갖는다.
권한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 그리고 책임은 투명성으로 증명된다. 앞으로 대한민국의 행정은 '비공개가 원칙'이라는 오래된 관행에서 벗어나 '국민 앞에 설명하는 행정'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선진 민주국가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행정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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