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해마다 주택 공급 확대를 발표한다. 수십만 호 공급, 신속 인허가, 공공주택 확대, 재건축 활성화, 신축 매입임대 확대…. 그러나 정작 국민이 체감하는 것은 공급이 아니라 지연이고, 약속이 아니라 반복되는 발표뿐이다.
최근 공개된 LH 신축 매입임대 자료는 이러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약정을 체결한 수도권 신축 매입임대 1만6000여 가구가 1년 이상 착공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사업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은 인허가와 설계 변경, 토지 확보, 공사비 상승, 자금 조달 등의 문제로 첫 삽도 뜨지 못한 채 멈춰 서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대한민국은 정말 공급이 부족한 것인가, 아니면 행정의 실행 능력이 부족한 것인가. 정책은 매년 새롭게 발표된다. 하지만 결과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담당 부처가 바뀌고, 장관이 바뀌고, 대통령이 바뀌어도 현장에서는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행정은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다.
허가를 내리는 공무원도 사람이고, 도장을 찍는 책임자도 사람이며, 정책을 만드는 정치인도 사람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미 주거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이다. 집이 없어 전세를 구하지 못하는 청년의 절박함도, 공사비 상승으로 사업성이 무너진 건설사의 현실도, 대출이 막혀 착공을 미루는 시행사의 고민도 직접 겪지 않는다.
결국 책임은 없고 권한만 남는다.
인허가를 빨리 내주어 문제가 생기면 감사와 책임을 져야 하지만, 늦게 처리한다고 해서 불이익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행정은 자연스럽게 "안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선택"이 된다. 이것이 대한민국 행정의 가장 큰 구조적 문제다.
해외는 어떻게 다를까
행정 선진국들은 정책 발표보다 실행 시스템을 먼저 만든다.
독일은 건축 인허가 절차가 엄격하지만 처리 기한이 비교적 명확하며, 일정 기간 내 결론을 내도록 제도를 운영하는 지방정부가 많다. 민원과 심사가 디지털화되어 예측 가능성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일본은 지방자치단체마다 차이는 있지만, 설계 단계부터 행정과 민간이 지속적으로 협의하는 사전협의 문화가 정착돼 있다. 문제를 착공 이후가 아니라 착공 이전에 해결하는 방식이다.
싱가포르는 정부가 토지, 교통, 주택, 기반시설 계획을 통합 관리해 공급 속도를 높인다. 여러 기관이 각각 허가를 내리는 방식보다 일원화된 의사결정 체계가 강점으로 평가받는다.
덴마크와 핀란드 등 북유럽 국가들도 전자행정과 행정 책임성을 강화해 허가 절차의 예측 가능성을 높여 왔다. 국민이 언제 결과가 나오는지 알 수 있고, 행정기관도 일정 수준의 책임을 진다.
반면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국토교통부, 지방자치단체, 소방, 환경, 교통, 교육, 문화재 등 수많은 기관을 거치는 복잡한 절차 속에서 하나만 늦어져도 전체 사업이 멈춘다. 문제는 어느 누구도 그 지연에 책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뉴욕은 규제가 많지만 예측 가능하다
미국, 특히 뉴욕은 규제가 적은 도시가 아니다. 오히려 복잡한 도시계획과 엄격한 심의를 운영한다. 그럼에도 민간이 사업을 추진하는 이유는 기준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비용은 많이 들 수 있지만, 어떤 절차를 거쳐 언제 승인 여부가 결정되는지 예측할 수 있다. 사업자는 불확실성보다 예측 가능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대한민국은 반대다.
사업을 시작해도 언제 허가가 날지 모른다. 공사비는 계속 오르는데 가격은 인정받지 못한다. 금융비용은 매달 늘어나는데 행정은 기다리라고만 한다. 이런 구조에서 누가 적극적으로 공급에 나서겠는가. 공사비는 현실인데 정책은 이상만 말한다
최근 정부는 공사비연동형 매입가격 제도를 폐지하고 감정평가 방식으로 일원화했다. 고가 매입 논란을 줄이겠다는 취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전쟁과 글로벌 공급망 불안으로 자재비는 급등했고, 인건비도 크게 상승했다. 금융비용까지 겹치면서 사업비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다. 민간 건설공사와 국가계약에서는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물가 변동에 따른 계약금액 조정 제도를 활용한다. 그런데 공공 매입사업에서는 공사비 상승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면 사업자는 착공을 미룰 수밖에 없다. 사업자가 탐욕스러워서가 아니다. 손해를 보면서 공사할 기업은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 원리를 무시한 정책은 결국 공급 감소라는 결과를 낳는다. 실행력이 국가 경쟁력이다
고(故) 이건희 회장은 오래전 "정치는 3류, 행정은 그에 못 미친다"는 취지의 발언으로 우리 사회의 실행력을 지적한 바 있다. 표현의 적절성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지만, 정책이 발표에 비해 실행에서 자주 지연된다는 문제의식은 지금도 많은 국민이 체감하는 현실과 맞닿아 있다.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를 만들고, 세계적인 조선 기술을 보유하며, K-콘텐츠로 세계 시장을 움직인다.
그러나 정작 국민의 삶과 가장 밀접한 주택 문제에서는 정책 발표와 실행 사이의 간극을 반복하고 있다.
정치는 발표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을 잘해야 한다.
행정은 규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또 다른 공급 계획이 아니다.
이미 발표한 정책을 실제로 움직이게 만드는 행정력이다.
주택 공급은 회의실에서 늘어나지 않는다.
도장이 찍히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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